현재 증시를 이해하고 미래 증시를 예측하는 방법
- 주식투자 역사를 공부하라 [06]
1981 ▶1990한국의 종합주가지수(KOSPI)의 등장
주가 대폭락의 3가지 원인
투자 손실로 밤잠 이루지 못한 서민들
1985년부터 시작된 대세상승장은 1989년 4월 1일 1,007포인트를 찍고 나서 하락세로 전환했다. 대세가 일단 하락으로 전환하자 수차례에 걸친 정부의 증시부양책에도 불구하고 반등다운 반등을 하지 못했고,
급기야 1992년 8월에는 최저점인 456포인트까지 떨어졌다. 투자 손실로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투자자나 증권사 직원이나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까지 주식투자는 소수의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1980년대에는 대부분의 가구가 주식을 보유할 정도로 대중화되었다. 주가 하락은 전국민의 고통으로 이어졌다. 서민의 재산형성을 돕기위해 보급한 국민주는 청약가 이하로 하락해 한순간에 ‘궁민주(窮民株)’ 로 전락했고, 시세차익의 보증수표 같았던 우리사주 주식은 현대판 ‘노비문서’로 둔갑했다. 회사융자로 매입한 우리사주 주가가 급락해 융자금을 상환할 수 없게 된 직원들이 융자금에 발목이 잡혀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도 회사를 그만둘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상투잡고 뒤늦게 증권시장에 뛰어들어 낭패를 본 농민과 지 1방 서민의 한숨 소리가 전국 곳곳에서 새어나왔다.
3년 만에 반토막난 코스피지수, 하락 원인 3가지
1989년 4월 15일 장중 고점 1,015.75를 찍은 코스피지수는 1990년 9월 21일에 559.98로 떨어져 45% 폭락한 데 이어 1992년 8월 21일에도 456.59를 기록해 55%나 폭락했다. 이러한 주가 대폭락의 원인은 경기
퇴조, 주가 버블, 수급 균형 붕괴 등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1) 거품의 소멸
첫째, 주가 버블이 심했다. 주식투자에서 주가가 단기에 지나치게 급등하는 것보다 더 큰 악재는 없다. 우리 속담에‘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다’라는 말이 있고, 서양 속담에도‘ 나무가 아무리 자라도 하늘에 닿지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증시 역사를 돌이켜볼 때 지나친 버블은 예외 없이 오래가지 못하고 폭락으로 이어졌다.
1985년 초 139포인트이던 코스피지수가 1989년 4월 1일 종가 기준으로 1,007포인트가 되어 4년 동안 무려 7.2배나 올랐다. 1988년 말 거래소시장의 PER(주가수익비율)는 26배로, 같은 시기 선진국은 11~15배
수준인 점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높은 편이다.
미국 S&P의 경우, 1985년 이후 20년간 평균 PER가 15.5였다. PER가 높다는 것은 주가 거품이 심하다는 뜻으로, 당시 일본도 PER가 58배 수준으로 높아 1990년 최고 3만 9,000엔을 기록했던 닛케이지수가 4분의 1 수준인 1만엔까지 떨어졌다(닛케이지수는 34년이 지난 2014년까지도 18,000엔 아래에 머무르고 있다).
특히 기업의 가치와 무관하게 거래가 많았던 금융, 건설, 무역 업종은 주로 투기적인 거래였다. 증권과 은행 업종의 평균 PER는 50배였지만 금융, 건설, 무역 업종 중에는 100배가 넘는 기업이 수두룩했다.
2) 경상수지 적자 시대 전환
둘째, 3저가 퇴조하고 경상수지가 적자로 전환되었다. 1986년부터 3년간 GDP성장률이 평균 12.5%를 기록하는 등 경이로운 성장을 지속했으나 88올림픽이 끝난 이후 1989년부터 3저가 퇴조하면서 GDP성장률도 한 자릿수로 내려왔다. 경상수지도 1989년에 흑자폭이 크게 감소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1990년에는 20억 달러 적자를 내고 말았다.
이를 시작으로 경상수지 적자 시대로 전환되었다. 세계경제가 불황으로 접어들고 국내경기도 나빠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인상과 부동산가격의 상승으로 물가는 더욱 올라가기만 했다.
3) 주식 과잉공급으로 수급 균형 붕괴
셋째, 공급물량이 많아져 수급 균형이 무너졌다. 유상증자와 기업공개로 인한 주식 공급물량은 1986년 1조, 1987년 2조, 1988년 7조였으나, 1989년에는 14조원에 이르러 너무 과다하게 공급되었다. 1988년말 시가총액이 64조원인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물량이 증시에 공급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기업을 공개하기 전에 대폭적인 유무상증자를 실시하여 소위‘ 물타기’ 증자도 기승을 부렸다. 금감원 자료에 따르면 1989년 1월~8월까지 8개월 동안 공모주 청약을 실시한 77개사 중 73개사가 공개 전에 평균115%의 유무상증자를 실시하여 자본금을 뻥튀기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당시 금융주 주가가 급등하자 금융기관들이 앞다투어 증자를 실시했다. 특히 증권회사는 해마다 1~2차례 유무상증자를 반복했고, 의결권이 없는 우선주 발행을 남발했다. 무의결권 우선주는 유독 1988~1989년에 급증하였는데 1989년 기준으로 유상증자 총액의 36%를 차지하였다. 이후 주가가 하락할 때면 대주주들이 고객들보다 먼저 우선주를 팔아치워 주가 하락을 부채질했다.
또한 80년대 후반부터 유상증자시 시가발행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시가발행에 의한 유상증자가 확대되면서 액면가 대비 평균 할증률이 1986년 11%, 1988년 124.9%, 1989년에는 340%를 넘어섰다. 이는 액면가 5,000원인 경우 유상증자 발행가액은 평균 22,000원이라는 의미이다.
과도한 유무상증자 물량은 주가 하락 시기에 매도물량으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주가 폭락은 정부의 수급조절 실패에 따른 인재(人災)라고 볼 수도 있다.
1988년 10월경 증권업계는 ‘상승 대세가 끝났다’라는 대세종결론 2과 ‘대세 상승이 계속된다’는 대세지속론으로 양분되어 시끄러웠다. 이 무렵 대우증권 심근섭 상무가 “증권시장의 대세 상승은 이제 끝났다. 경기사이클을 볼 때 정점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2~3년간경기는 장기침체로 빠져들 것이며 주가도 하락할 것이다”라는 글을 게재했다.
이와 같은 비관적 전망은 여전히 상승 지속에 기대를 걸고 있던 대다수 투자자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격이었고, 낙관론자들의 신랄한 도전을 받았다. 그러나 심상무의 예언은 4개월의 시차가 있었을 뿐 정확하였음이 훗날 증명되었다.
※ 이 포스트는『대한민국 주식투자 100년사』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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