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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투자 역사를 공부하라 05]공모주 청약 전성시대, 단타도 100% 이상 수익

생활 매뉴얼/재테크

by 길벗 출판사 2015. 5. 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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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증시를 이해하고 미래 증시를 예측하는 방법

- 주식투자 역사를 공부하라 [05]


1971 ▶1980 울고 웃는 건설주와 고공행진 공모주 청약

[이야기 주식투자 역사] 공모주 청약 전성시대, 단타도 100% 이상 수익


주식시장의 시장참여자(외인, 기관, 개인 등) 중 주식 투자 결정과 그에 따른 결과를 100% 책임지는 시장참여자는 개인투자자들뿐이다. 급등락을 반복하는 증권시장에서 개인투자자들이 패자가 되지 않으려면 증권시장의 속성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증권시장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증권시장의 속성을 파악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증권시장은 매일 새롭게 변하는 것 같아도 끊임없이 폭등과 폭락을 반복하는 가운데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가 보여주는 반복된 패턴 속에서 미래 증시방향과 주식투자의 법칙을 찾아보자. 


공모주 청약이 돈이 된다더라


평범한 회사원 김영진은 공모주 청약으로 돈버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공모주가 상장이 되면 100% 이상 오르는 것은 기본이고 200%이상 오르는 종목도 많아서 공모주를 배정받기만 하면 돈을 벌 수 있었다.

상장이 된 뒤 주가가 하락하더라도 주간사가 6개월 동안 공모가 이상으로 주가를 유지해 주는 ‘시장조성의무’가 있기 때문에 최소한 손해를 볼 염려는 없었다. 공모주 투자에서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기와 같았다. 공모주 청약이 돈이 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에 붐이 일었다. 김영진도 신문에 공모주 청약공고가 나오면 빠짐없이 청약했다


신주청약을 위해 증권사 창구에 몰린 투자자들 1973. 12.

신주 청약을 위해 증권사 창구에 몰린 투자자들 1973. 12.


청약할 때마다 수익을 실현하였으니 주식투자 재미가 쏠쏠했다. 김영진은 1975년에 공개된 한국나이론, 한국폴리에스터, 태원물산, 동양제과 청약에 응모해 단기간에 평균 100% 이상 수익을 내고 팔았다. 청약 열기가 높아지자 정부는 1인당 배정 주식을 50주로 제한했다. 주식을 한 주라도 더 받으려면 머릿수가 많은 것이 유리했다. 김영진은 더 많은 주식을 배정받기 위해 부인과 대학에 다니는 자녀 두 명도 청약에 동원했다.


큰손과 정관 계실력자에게 뇌물로 바쳐진 청약표


이처럼 공모주 청약이 붐을 이루게 된 데는 정부가 1972년 말에 제정한 ‘기업공개촉진법’의 영향이 컸다. 이 법은 기업공개가 부진하자 정부가 고안해 낸 고육지책으로, 기준에 맞는 기업을 공개 대상으로 지정한 뒤 강제적으로 공개를 명령했다. 거부하는 기업은 세제상의 불이익과 금융지원 제한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1972년 7개에 불과하던 공개 대상 기업이 1973년에 47개, 1978년에는 무려 356개사로 늘어났다.

공모주 청약으로 단기에 2~3배 수익이 나자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거액투자자 중에는 여러 명의 청약꾼을 고용해 청약표를 받아오게 하는 방식으로 공모주를 싹쓸이하는 경우도 많았다. 청약 영수증을 받은 사람 중에는 즉석에서 프리미엄을 붙여 전매하기도 했고, 공모주 중 상당한 물량은 큰손과 정관계 실력자에게 뇌물로 바치기 위해 증권사 직원이 뒤로 빼돌리기도 했다.


정보에 따라 투자하다


공모주 청약으로 증권투자에 재미를 붙인 김영진은 1976년에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그동안 벌어놓은 돈과 퇴직금 일부로 본격적인 증권투자에 나섰다. 친구와 가족이 말렸지만 그는 매사에 경직된 국영기업체에서 근무하는 것보다 증권투자를 하는 것이 시대 흐름에 맞고 본인 성격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사표를 제출한 뒤 그는 투자를 하며 알게 된 증권회사 지점장의 권유에 따라 명동 증권빌딩에 있는 D증권회사 구석방으로 매일 출근했다. 1976년부터 증권시장은 중동의 검은 모래바람으로 술렁였다. 이 바람은 건설주가 주도했는데, 특정 건설사가 중동에서 수주를 했다는 루머만 돌아도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주가는 며칠씩 상한가를 쳤고 수백만 주씩 연일 상한가 잔량이 쌓였다.

그 중 삼환기업과 경남기업이 대표적이었다. 김영진은 경남기업을 집중 매매했다. 1976년 1월 8일 경남기업 주식을 8,900원에 매수하자 곧바로 8,420원까지 하락했다. 매도하지 않고 기다렸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9,200원으로 올랐다. 바로 매도하여 이익을 실현한 뒤 이틀 뒤인 1월 31일에 9,000원에 매수하고 다시 2월 14일에 12,000원에 매도하는 식으로 계속 단기매매를 했다. 이런 식으로 경남기업 주식을 주로 매매한다고 해서 명동의 증권투자자들은 그를‘ 경남아저씨’라 부르기도 했다.

김영진은 경남기업 매매를 통해 어느 정도 목돈을 만들었고 증권투자에도 자신이 생겼다. 정보만 있으면 얼마든지 쉽게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혼자서 정보를 얻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몇 사람을 모아 정보와 투자를 공유하는‘ 투자클럽’을 만들었다.

신문기자 1명, 증권사 직원 1명, 중견 건설회사 임원 1명을 끌어들여 10억원의 자금을 조성한 뒤 각자 정보수집과 정보전달 등의 역할을 분담했다. 공통의무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는데, 특히 중동에 진출하는 기업정보가 가장 값지고 으뜸가는 정보였다. 해외에 진출하는 건설회사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에게는 그 대가로 돈이나 주식을 나눠주기로 했다.




투자 성공을 안겨준 동아건설


1976년 8월, 클럽 멤버 중 한 명이 반가운 정보를 가지고 왔다. 동아건설이 큰 폭의 유무상증자를 검토 중이라는 정보였다. 건설주가 급등하는 시장에서 대규모 증자는 큰 호재임이 분명했다. 정보력을 총동원해 동아건설 임원으로부터‘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증자를 해야 할 상황’이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래프를 보니 동아건설 주가는 1975년 10,000원에서 출발해 1차 상승 이후 1976년 2월부터 5개월 동안 30,000원대에서 횡보하고 있었다. 당시 건설주 주가 동향에 비추어볼 때 3배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은 정보가 아직 주가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클럽 멤버들은 뛰는 가슴으로 동아건설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8월 중순부터 30,000원에서 35,000원 사이에 집중 매입했다. 물량을 어느 정도 확보한 9월쯤 증자 소문이 증권시장에 나돌았고 주가는 급등세로 돌변했다.

동아건설은 무상증자 50%를 발표했고 권리부 주가가 49,800원으로 뛰었으나 주식을 팔지 않고 증자를 받았다. 주가 급등은 9월 29일 권리락 시세 25,000원을 시작으로 본격화됐다.

10월이 되자 주식을 구할 수 없었다. 매물이 사라진 것이다. 아침 동시호가에 상한가로 10,000주 매수주문을 넣으면 100~500주 정도만 체결되고 동시호가 시간 이후에는 백만 주 이상 상한가 잔량만 쌓이고 거래가 아예 끊겼다. 1~2주 연속 상한가를 친 뒤 2~3일 소폭 조정하는 상승추세가 이어졌다.

급기야 증권거래소가 단기급등을 이유로 동아건설을 감리종목으로 지정했지만 하루 최대 상승폭을 3%로 축소하는 조치가 오히려 투자자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고, 더 많은 상한가 잔량이 쌓이는 요인이 되었다. 주식 매수대금을 100% 미리 입금해야만 매수주문을 낼 수 있게 하고 신용거래 대상 종목에서 제외시켰지만 동아건설 주가의 상승세는 꺾일 줄 몰랐다.

증권시장에서 주식을 살 수 없게 된 투자자들은 일주일이나 10일 상한가 가격을 기준으로 장외에서 거래하기도 했다. 김영진은 밤이 지겨웠다. 날이 빨리 지나가야 상한가를 치는 횟수가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진은 동아건설 주식을 60,000원대에 전량 매도했다. 무상주 50%와 신용매수분을 감안하면 500%에 가까운 수익이었다. 동아건설은 그후에도 지속적으로 상승해 1978년 6월 19일 장중가격이 80,000원까지 올랐고, 이날 장외에서 거래된 가격은 100,000원이었다.

1975년 저점인 7,400원에 매수한 투자자가 유무상증자를 모두 받은 뒤 1978년 고점인 75,000원에 매도했다면 대략 25배의 투자 수익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최저점에 매수한 뒤 최고점에 매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고, 대부분의 투자자는 단기매매를 했다.




정보로 일어선 자, 정보로 망한다


김영진은 주식투자로 번 돈으로 정릉에 대지 100평, 건평 60평짜리 양옥과 상가주택을 샀다.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투자자로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에 몹시 흡족했다. 그러나 증권투자에 있어 자만은 화를 초래하는 첫걸음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에게 실패를 가져다준 결정적인 종목은 건설산업이었다.

1978년 3월 멤버 중 한 명이‘ 건설산업이 사우디에서 대규모 수주를 딸 것’이라는 정보를 가지고 왔다. 건설산업 주가를 확인해 보니 이미 해외수 주설과 증자설로 상승세를 타고 있어 물량 확보가 용이하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아침 동시호가에 상한가 주문을 넣었으나 체결되지 않다가 6일째 되는 날 주당 16,000원에 체결되었다. 주가가 올라 26,000원이 되자 장외에서 30,000원을 줄 테니 주식을 넘기라는 요구가 들어왔지만 거절했다.

그러나 며칠 후 건설산업 주가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100% 유상증자설이 돌았는데 막상 발표된 내용은 50% 유상증자에 그치자 실망한 투자자들이 한꺼번에 매도주문을 내어 주가가 하한가로 돌아선 것이다. 떨어지는 주가를 잡으려고 두번째 하한가 날부터 신용계좌 여러 개를 동원해 힘닿는 데까지 사들였지만 하락세를 역전시키기엔 부족했다. ‘악재는 몰려다니는 법’이라는 말 그대로 시장에 떠돌던 사우디 공사 수주설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산이 깊으면 골도 깊듯이 급하게 오른 만큼 떨어질 때는 매도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6일 연속으로 아침 일찍부터 하한가 매도주문을 냈지만 사는 사람이 없었다. 기다리던 반등도 끝내 찾아오지 않았고 보름 만에 차명계좌 9개를 포함한 모든 계좌가 담보부족 상태로 떨어졌다. 주가 하락은 건설산업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건설주들이 7월이 되자 하락세로 돌변했다. 건설산업 매매 결과는 참담했다. 보유주식이 모두 반대매매당하고도 채무가 남아 정릉 집과 상가주택까지 처분해야 했다. 1977년 6월 30일 상장 된 건설산업은 1980년 9월에 부도를 낸 뒤 상장 4년 만인 1981년 6월 23일에 거래소에서 퇴출되었다.

김영진에게 건설주 투자는 일장춘몽으로 끝이 났다. 김영진은 그동안 정보에만 의존해 매매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는 다시는 정보에만 의존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기술적 분석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




※  이 포스트는『대한민국 주식투자 100년사』에서 발췌했습니다.



대한민국 주식투자 100년사

저자
윤재수 지음
출판사
길벗 | 2015-01-02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대한민국 주식투자 역사에서 찾는 현명한 투자의 길!역사는 반복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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